詩 隨筆 等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시인 박인환

雲山(뭉개구름을 머리에 이고있는 산) 2012. 7. 12. 11:15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  시인 박인환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나와 우리들의 죽음보다도
더한 냉혹하고 절실한
회상과 체험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여러 차례의 살륙(殺戮)에 복종한 생명보다도
더한 복수와 고독을 아는
고뇌와 저항일지도 모른다.

 

한 걸음 한 걸음 나는 허물어지는
정적(靜寂)과 초연(硝煙)의 도시
그 암흑 속으로 …

 

명상과 또 다시 오지 않을 영원한 내일로 …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유형(流刑)의 애인처럼 손잡기 위하여

 

이미 소멸된 청춘의 반역(反逆)을 회상하면서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侮蔑)의 오늘을 살아 나간다.

 

…아 최후로 성자(聖者)의 세계에
살아 있는 것이 있다면 분명히
그것은 속죄(贖罪)의 회화(繪畵) 속의 나녀(裸女)와
회상도 고뇌도 이제는 망령(亡靈)에게 팔은
철없는 시인(詩人)

 

나의 눈 감지 못한 
 단순한 상태의 시체(屍體)일 것이다 ….

 

= <박인환 시선집>(1955) =

 


 

 

 

 

해                설
 
[개관정리]

◆ 성격 : 냉소적, 비판적, 주지적

◆ 중요시어 및 시구풀이

◆ 주제 ⇒ 전후의 절망과 허무의식
 
[시상의 흐름(짜임)]

◆ 1연 : 회상과 체험 뿐인 삶

◆ 2연 : 고뇌와 저항 뿐인 삶

◆ 3연 : 회의와 불안만 있는 모멸적인 삶

◆ 4연 : 삶에 대한 절망과 죽음의 인식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이 시는 엘리어트의 <4중주(四重奏)>의 첫 구를 빌어
전후(戰後)의 황폐한 현실로부터 느끼는 허무 의식과 불안의 시간을 극복,
 초월하고 싶어하는 욕망을 긴장감 있는 언어로 표현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여러 차례의 살육에 복종한 생명'들로 인한
 '정적'과 아직 '초연'이 자욱한 도시의 암흑 속에서
모든 소망을 상실하고 '소멸된 청춘의 반역을 회상하'는
다만 '살아 있는' 존재일 뿐이다.

 

그가 살아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냉혹하고 절실한 / 회상과 체험',
 '복수와 고독을 아는 / 고뇌와 저항', '회의와 불안만이 다정스러운 모멸'로
'고뇌와 저항', '회의와 불안'만이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전후의 황폐한 도시는 이미 신(神)도, 인간도 존재하지 않는
 폐허이다. 그러므로 '……

 

아 최후로 이 성자의 세계'라는 구절은 참담한 현실의 반어적 표현일 뿐이며,
그 곳에 '살아 있는' '나와 우리들은' 모두 '시체'라는
 역설적 표현을 통해 시적 화자는 그곳이 더 이상 삶이 존재할 수 없는
곳이라는 비극적 인식으로까지 다다른다.

 

그와 같은 극도의 절망감과 허무 의식은 시대 현실에 저항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모멸감으로 발전됨으로써 자신을 '철없는 시인'으로
 비하(卑下)시키고 마침내 죽음에 대한 강한 충동을
 '나의 눈 감지 못한 / 단순한 상태의 시체일 것'이라는
 마지막 시행으로 표출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전쟁의 잔인성을 고발한다거나
 전후의 비극적 분위기를 제시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비극적 현실을 날카롭게 응시하는 방법을 통해
그것을 이겨내려는 치열한 시 정신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