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 隨筆 等

역 - 황인숙 [제1회 철도문학상 수상작]

雲山(뭉개구름을 머리에 이고있는 산) 2015. 2. 26. 16:40



 

역 - 황인숙  [제1회 철도문학상 수상작]


어느 화가의 혼을 불어넣은 듯한 색깔이 눈에서부터 마음까지 

스며드는 시골의 가을, 오후의 기차는 역을 떠났다. 

길게 내뿜는 기적소리가 황혼에 젖은 국화의 머리에 얹혀 빈 플랫폼을 지킨다. 

기차의 레일처럼 평행을 긋고 세상은 앞만 보고 달려간다.

 5일장이 서는 장날이면 보따리장수들의 수다와 담배연기로 

대합실이 출렁이고, 완행열차를 기다리는 손님들로 

긴 행렬을 잇던 시끌벅적한 시골역의 모습은 고속열차들의 등장으로 

이제는 녹슨 풍경화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내 유년의 추억이 가득한 기차역에서 기억을 정지시키고 

산을 휘감고 길게 이어진 평행선 철로를 바라본다.


스무 살 때로 기억된다. 사범대학에 합격하고도 

삼남매의 맏이였던 나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어려워진 형편과 두 남동생들 걱정으로 스스로 진학을 

포기해야만 했던 절박한 순간이 있었다. 

하지만 딸자식을 위해 우리 부모님은 중대한 결심을 하셨다.
 
집을 팔기로 하신 거다.


고향에서의 20년의 추억을 완행기차에 싣고 대구로 떠나오던 날, 

개찰을 하고 플랫폼으로 

나가는데 다급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께선 단숨에 달려오시더니 “이 녹음기, 

집이랑 바꾼 거다. 집 생각 날 때마다 들어라" 

하시며 내가 그토록 소원하던 녹음기를 불쑥 내미셨다.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그만 주르륵 흘러내렸다.

 기차는 미끄러지듯 서서히 움직였고 나는 그렇게 부모라는 역을 떠나왔었다. 

내가 떠나오던 그날도, 내가 시집가던 날도, 또 동생들이 결혼하던 날도 

어머닌 “자식이 크니까 부모는 그저 역(驛)일뿐인 게지" 

하시며 멀어져가는 자식이란 기차에 눈물 풍선을 매달고 작은 손을 흔드셨다.

 멀어져 갈수록 형체는 작고 희미해지지만 흔들던 작은 손은 너무나도 크게 보였던 

어머니의 손, 내가 힘들 때마다 동그란 격려의 역이 되어주었다.

자식들을 떠나보내고, 늘 묵묵히 자식들이 오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 

언제나 편안한 역, 그러나 나는 그 역을 잊고 산 적이 많았다. 


어느 해 봄, 그날도 옛집을 되찾기 위한 아버지의 일념은 약초를 캐러 산으로 가셨고, 

아버지가 다쳐서 이웃집 아저씨 트럭에 실려 오셨다는 

어머니의 떨리는 전화를 받고 달려간 병원에는 햇볕에 그을린 

까만 피부와 얼굴과 몸에 온통 감긴 하얀 붕대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대조된 

처연한 모습의 아버지가 응급실 침대에 누워 계셨다. 

살이 닳을 대로 닳아 아버지 엄지손가락엔 지문이 없다는 의사선생님 말씀을 듣는 순간, 

난 비로소 떠나온 역에 대한 나의 무심함을 절실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사랑이 클수록 아픔은 참으로 모질었다.


퇴원하시던 날, 아버지께서 내미신 낡은 통장에는 몇 천원에서 

몇 만원까지 저금한 숫자들이 빼곡하게 박혀있었다. 

아버지의 지문을 모조리 삼켜버린 그 통장은 도시계획에 의한 새 길이 나면서 

대학진학을 위해 팔았던 옛집을 되찾는 기적을 안겨주었다. 

마당 한가운데가 도로로 뜯겨나가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비로소 되찾은 

아버지의 편안한 울타리, 

가로 10㎝ 세로 20㎝ 남짓한 하얀 대리석에 아버지 성함이 새겨진 

문패를 다시며 애써 태연해 하시던 

두 분의 흥분된 얼굴은 마치 해탈한 고승의 미소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머지않아 나도 곧 두 아이의 역이 되겠지? 내가 살아가면서 지치고 힘들 때면, 

자식을 위해 한평생 속으로만 간직한 울먹이는 사랑으로 늘 그 자리에서 묵묵히 

내 가슴속에 용기와 희망의 기적소리를 울려주시는 나의 부모님처럼…….


시골역의 오후 풍경이 조용히 저물어 가고 있다. 

녹음기를 내 손에 꼭 쥐어주시던 마디 굵은 아버지의 

손가락 사이로 또 기차가 지나간다.

 어느새 백발이 되어 칠순이 된 부모님, 

하얀 서릿발을 지우며 가냘프기 그지없는 

내 줄기에 결코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물을 퍼부어 

싱싱한 꽃대를 피워 올리게 해 주신 나의 변함없는 

부모(父母)라는 이름의 역으로 나는 지금 가고 있다.


만산홍엽이 아름다운 것은 봄을 위해 자신을 소진하는 낙엽의 

절박한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한여름, 삶에 지친 사람들에게 시원한 쉼터를 아낌없이 내어주고, 

가을이면 낙엽 닮은 추억들을 소담하게 담아 주는 

저 기차역 같은 사람이 되어보리라. 떠나는 사람, 또 기다리는 사람 모두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