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팔도지리지(朝鮮八道地理志)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地理學者)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 1690∼?)은 택리지에서 우리나라 산세와 위치를 논했다, 거기에는 팔도의 위치와 그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 다루고 있다. 즉, 경상도는 변한(弁韓) 진한(辰韓)의 땅이고 함경 평안 황해도는 고조선(古朝鮮) 고구려(高句麗), 강원도는 예맥(濊貊)의 땅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팔도라고는 하지만 원래 경기에는 도(道) 자를 붙이지 않는 것이 정칙(正則)이다. 경기도에는 다른 명칭이 없다. 나머지 7도에 대한 명칭과 경계는 다음과 같다. 호서(湖西)는 충청도 땅이다. 충북 제천 의림지호(義林池湖)의 서쪽에 있다. 조선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가 정도전(鄭道傳)에게 조선팔도(朝鮮八道) 사람들의 성품을 평하라고 하자 정도전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출신지인 함경도 사람들의 성품에 대해서는 평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태조는 아무 말이라도 좋으니 어서 말하라고 재촉하였다. 정도전은 머뭇거리며 “함경도는 이전투구(泥田鬪狗)이옵니다”라고 아뢰었고, 태조 이성계는 이 말을 듣고 얼굴이 빨개졌다고 한다. 이전투구(泥田鬪狗)란 진흙 밭에서 싸우는 개처럼 맹렬하고 악착스럽다는 뜻으로 천박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석전경우(石田耕牛)란 자갈밭을 가는 소라는 뜻으로 부지런하고 인내심이 강한 성격이라는 좋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편, 조선 정조 때 대사간. 도승지.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역임한 규장각 학사(學士) 석재(碩齋) 윤행임(尹行恁: 1762-1801)이 어느 날 정조 임금과 각도 사람들의 성격에 관하여 한담소일(閑談消日)할 때 8도의 인물을 평한 사자평(四字評)이 전해 내려온다. 임진왜란 때. 이여송의 지리참모로 조선에 왔던 두사충(杜師忠)의 사위인 나학천이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중국 남경의 건주(建州) 출신으로 장인과 함께 조선에 귀화한 인물이다. "나학천비결(羅鶴天秘訣)"에서 조선 팔도의 인물평을 다음과 같이 하였다. 1) 함경도 사람은 우직지협(愚直知夾) / 사람은 우직하지만 지혜를 가졌다. 5) 강원도 사람은 칩복지단(蟄伏知短) / 거처에 가만히 있고 아는 것이 없다.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志)'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조건으로서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4가지를 들었다. 무엇으로서 인심을 말할 것인가? 공자께서 "마을의 풍속이 착하면 아름다운 것이 된다. 아름다운 곳을 가려서 살지 아니하면 어찌 지혜롭다 하리오." 하시었고, 옛날. 맹자의 어머니가 세 번이나 집을 옮긴 것(孟母三遷)은 아들을 훌륭하게 가르치고자 함이었다. 사람이 살 고장을 찾을 때에 그 착한 풍속을 가리지 않으면 비단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도 해가 있어서 반드시 좋지 못한 풍속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 그러니 살 곳을 가리는데, 그 땅의 세상 풍속을 보지 아니하면 안 된다. 우리나라 팔도 가운데 평안도 인심은 순후(醇厚)하여서 제일이요, 다음은 질실(質實)한 경상도 풍속이다. 함경도는 오랑캐와 접경하여 백성이 모두 굳세고 사나우며, 황해도는 산수가 험악한 까닭으로 백성들이 거의가 사납고 모질다. 강원도는 산골짜기 백성으로 몹시 불손하고, 전라도는 오로지 교활함을 숭상하여 그른 일에 움직이기 쉽다. 경기도는 도성 밖의 야읍(野邑)은 백성들의 재물이 시들어 쇠하였고, 충청도는 오로지 세도와 재리(財利)에만 따른다.」 지베르니(Giverny)라는 도시 모네는 어린 시절 인구 300명에 불과한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그곳은 파리와 멀지 않으면서도 도회지의 복잡함을 피할 수 있는 아늑한 곳이었다. 모네가 40년 넘게 작품 활동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지베르니는 세계적인 명소가 되어 매년 수백만 관광객들이 찾는 유명한 명소가 되었다. 아무리 작고 이름 없는 마을이라도 어떤 명사가 살았느냐에 따라 그 마을의 운명이 바뀔 수 있다. 모네뿐만이 아니다. 당신이 지금 발 딛고 서 있는 장소도 당신이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최고의 명소로 유명해진다면. 욕심일까? 우리나라에도 유명 인사들의 탄생지를 추모하여 비석을 세운다. 영월의 홍길동 탄생지 내성적인 여행자, 정여울의 글에서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 청풍명월 (충청도)편 흔히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을 평할 때 ‘청풍명월(淸風明月)’이라고 한다.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이다. 정도전의 평으로 알려졌다.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시절과 인생을 논하고 해학과 풍자를 즐기는 것이 양반의 습성이라는 것이다. 지리적으로 산과 들이 적당히 조화를 이루고 천재지변도 많지 않은 곳이 충청도 땅이다. 이러한 자연적 현상이 사람들의 성격에도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원래 충청도 기질의 참모습은 ‘은근과 끈기’, ‘외유내강’으로 대변되는 선비정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충효정신이 남다른 민족인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나라를 사랑하고 부모님께 효도하는 정신이 투철했다. 그래서 그런 인품을 지닌 사람들을 가문과 지역의 명예로 삼았다. 이런 면에서 충청도 사람들이 다른 지역의 사람들로부터 그런 칭송을 듣는 것은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굽이 굽이 물따라 굽이 굽이 산따라 어젯밤엔 안개도 어지간히 젖더니 충청도 사람들의 기질 인간관계를 하다보면 상대의 심중을 헤아리기가 어려울 때가 많다. 특히 충청도 사람들의 심중을 알기가 가장 어렵다고들 한다. 두루뭉술하다. <예> <아니오> 가 아닌 경우에 말이다. 직설화법이 아니고 좀처럼 속을 보여주지 않는 성향에 에둘러 말하는 특성이 있다. 그런 것을 긍정적인 시각으로 보고, 신중하다고 말 하는 이도 있지만. 그런 화법이 썩 맘에 들지는 않고, 답답할 때가 많다. 염려 말어"는 찍어 준다는 뜻이고 "글씨유?"소리가 나오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다. 더 큰 부정은 "냅둬유"이고 완벽한 부정은 "절단 나는겨" "소용읎슈" 아니면 "틀렸슈" 충청도 특징 중 하나는 느리다는 점이다. 그것은 동작이 느리다기 보다 마음의 여유인 경우가 많다. 충청도 아주머니에게 입금을 해줄 일이 있어 전화로 계좌번호를 물었더니, 아줌마가 불러주는 계좌번호가 이상하게 길었다. 29649632967296 숫자가 너무 길다고 했더니 아줌마! 뭔 소리유? 4개 밖에 안불렀는디유.. 다시 부를께유. 2구유 4구유 3이구유 7이구유.. 정치가 세 명이 무더운 복날 소문난 보신탕집을 찾아갔다 000 정치가 세 명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영감님 고이 주무실 일이지, 할머니 마지못해 충청도 아가씨 기도문 지가 죽일 년이구만유. 평화의 주님유. 현대경제연구소는, 태전이 '미래에 각광을 받을 도시 1위로 선정하였다. 그 외에도 충청권의 핵심요지인 태전이 앞으로 새로운 수도가 된다는 예언들이 많이 있었다. "太田이 大田으로 바뀌게 된 동기"는? 수도가 될 땅의 운수(地運)가 이미 서울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이동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에 걸맞게 새로운 인물이 나타난다는 것을 암시한다. 지금은 100만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살며 정부 제 3청사가 들어와 있는 큰 도시가 되었다. 미전역(微田驛)? 그럴듯한데 태(太)에는 콩 태, 클 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태전(太田)이라는 지명이 된 것이다. '한밭' 의 '한'은 크다, 밝다, 동쪽, 하나, 처음 등이며, '太田'의 '太'는 이러한 '한'의 의미와 '콩'의 의미를 함께 아우르고 있다. 태전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 것은, 1901년 경부선 철도가 건설되고 이곳에 역(驛)이 생기면서부터다, 그 후부터 이곳 콩밭, 한밭의 공식 지명이 태전(太田)으로 기재되었다. 경실국치(庚戌國恥) 한 해 전인 1909년, 당시 순종황제를 호위하며 이곳을 지나던 이등박문(伊藤博文)이 태전역에 내렸다. 그는 이곳의 그는 항상 일본 승려를 데리고 다녔다. 그 고승은 남산 국사당을 허물고 그 자리에 신사를 설치하라는 안을 낸 작자다. 그런 고승에게 명승지지(名勝地地)를 찾아, 그곳의 지명을 바꾸어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런 그가 이의를 제기했다. 단번에 바꾸면 들킵니다. 처음에는 태자 대신에 대자로 바꾸어 대전역으로 하고, 궁극적으로는 미전역으로 바꾸라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얼마 후에는 폐역이 되어 미미한 보통의 고을(밭)밖에 될 수 없다는 간자(間者)다운 계책이었다. 조선의 정기를 끊으려면 왕도에서 기가 가장 왕성한 3곳의 혈(穴)을 끊어야 한다는 보고서가 이들로부터 본국에 올라왔다. 3곳이란 북한산, 창경궁, 그리고 남대문이었다. 사람의 정수리, 심장 그리고 단전의 경락이다. 그래서 북한산 정상에 쇠말뚝을 박고 창경궁 궁원에는 밤마다 맹수가 우짖는 동물원으로 만들고 남대문은 전차시발역으로 하여 굉음을 내도록 하고, 남산에는 일본의 신들을 모시는 신사를 지었다. 일본이 망하고 나니 고승의 농간을 안 우리 정부는 아예 세종시라는 전혀 다른 이름을 붙여 역사적인 간계(奸計)를 일거에 무력화시켰다. 아울러 이곳을 장차 한반도의 중심 역할을 맡기도록 할 심사였다. 그래서 충청도의 중심 세종시는 대한민국 행정수도가 된 것이다. 경상도 기질 1. 무뚝뚝하다. 말이 없다. 고집이 세고 자존심 세다. (그러나 친해지며 좃나 말 많다 . 귀찮아 질 정도로 친절해 진다. 2. 개인보다 우리를... 밥은 못 먹어도 자존심은 우선 챙긴다. 그리고 돌아서 운다. 후회한다. ("나"보다 "우리"를 찾는,공동체의식이 강하다.) ("우리가 남이가"---강한 공동체의식을 잘 표현한 말이다) 3. 감정이 나며 아낌 없이 표출한다. 숨길 줄 모른다. 그래서 뒤끝이 없다. 돌아서면 모두 잊어 버린다. 4. 강자에겐 강하게, 약자에겐 약하게.. (이건 자존심문제로 생각한다.) 전라도 기질 1친절하다 처음 본 사람인데도 간까지 뺄 줄 정도로 친절하거. 사근사근하다. 2. 우리보다 개인을... 당연히 자존심보다 개인 영달의 실익을 우선 찾는다. 그래서 친절에 대한 보답을 당연하게 여긴다. ("우리" 보다 "나"를 찿는다.. 개인이기주의를 우선시 한다.) (그리고 만약 친절에 대한 보답이 없거나, 실익이 없다면 냉정히 돌아선다.) (그리고 돌아설 때 꼭 상대의 뒤통수를 친다. 왜 앞에선 이야기 안하는 지 몰라) 3. 뒤끝이 있다.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다. 4. 강자에게 부드럽게, 약자에게 강하게, 반골성향이 강하다.(우리 보다 개인의 영달에 아무런 도움이 안되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인 지, 모른다..) 경상도 남자들 퇴근하면 딱 3마디만 하는데... 아는? 요즘은 한마디가 추가 되었답니다. 아는? 이율곡 선생님께서 10만양병설을 주장하셨을때!~~ 전하~!10만의 대군을 양성해서 왜적의 침입에 미리 대비를 하셔야합니다~! 이렇게 애기를 하셔야하는데!~싸투리루!~ 전하! 자들이 움메나(얼마나) 빡신지(억센지), 영깽이(여우) 같애가지고 하마(벌써) 서구문물(서구문명)을 받아들여가지고요, 쇠꼽 덩거리(쇠 덩어리)를 막 자들고 발쿠고(두드리고 펴고) 이래가지고 뭔 조총이란걸 맹글었는데, 한쪽 구녕(구멍) 큰 데다가는 화약 덩거리하고 재재한(조그만) 쇠꼽 덩거리를 우겨넣고는, 이쪽 반대편에는 쪼그마한 구녕(구멍)을 뚤버서(뚫어서) 거기다 눈까리(눈알)를 들이대고, 조총_ 조선 후기 대표 저 앞에 있는 사람을 존주어서(겨누어서) 들이 쏘며는, 거기에 한번 걷어들리면(걸리면) 대뜨번에(대번에) 쎄싸리가 빠지쟌소(죽지 않소). 그 총알이란게 날아가지고 대가빠리(머리)에 맞으면 뇌진탕으로 즉사고요, 눈까리(눈알) 들어 걸리면 눈까리가 다 박살나고, 배떼기(배)에 맞으면 창지(창자)가 마카(모두) 게나와가지고(쏟아져나와서) 대뜨번에(대번에) 쎄싸리가 빠져요(죽어요). 그리고 자들이 떼가리(무리)로 대뜨번에(대번에)덤비기 때문에 만명, 2만, 5만 갖다가는 택도 안돼요(어림도 없어요). 10만이래야(10정도는 되어야) 되요. 분명히 얘기하는데 내 말을 똑떼기(똑바로) 들어야 될 끼래요 될 꺼예요). 그리고 자들이요, 움메나(얼마나) 영악스러운지요, 순순히 이래가지고는 되지 않아요. 우리도 아주 더 빡시게 나가고, 대포도 잘 맹글고, 훈련을 잘 시켜서 이래야지 되지 안그러면 우리가 잡아 먹혀요. 서울사람과 경상도 사람 서울ㅡ하지 마 서울ㅡ너 짜증나 서울ㅡ넌 애가 왜 그래? 서울ㅡ조용히 해. 시끄러 서울ㅡ가만히 못 있겠니? 서울ㅡ그건 좀 아닌 거 같은데? 서울ㅡ까불래? 서울ㅡ혹시 담배 있으면 하나만 빌릴 수 있을까? 서울ㅡ도와주세요 서울ㅡ살려주세요 서울ㅡ혹시 남의 거 가져가셨습니까? 서울ㅡ이리주세요 제 것입니다 서울ㅡ빨리 돌려주세요. 서울ㅡ 그 아이가 이 아이니? 서울ㅡ아니요. 다른 사람입니다 서울ㅡ뭐라고 하는 거니? 서울ㅡ무슨 말인지? 서울ㅡ힘들어요 서울ㅡ 너무 힘들어 서울ㅡ저기 저 아이 아세요? 서울ㅡ도대체 당신은 저한테 왜이러십니까? 서울ㅡ안녕히가십시오. 서울ㅡ아니야 형이 사줄게? 서울ㅡ형이요? 서울ㅡ좀 힘이 들거야? 서울ㅡ어떻게 해야 합니까? 서울ㅡ가져가라 서울ㅡ 네 것이냐? "너 립스틱 색깔이 이쁘다." 경상도 사투리로.. ☞ 니 주디 와 그카노? 멋진 아가씨"를 경상도 사투리로.. ☞ 믄디 가시나 "멋진 사나이를 경상도 사투리로.. "우와! 끝내주는데? 오늘 저녁 반찬은 뭐야?" ☞ 밥도 “경찰 아저씨"를 경상도 사투리로..☞ 갱찰아재 "할아버지 진지 잡수세요"를 경상도 사투리로.. ☞ 할배 밥무라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를 경상도 사투리로.. ☞모라카노? 남도기행 벌교 꼬막 남도는 푸짐하다. 아줌마들의 허리통도 푸짐하고 마음씨도 넉넉하다. 얼굴은 평수가 넓다. 산과 들에 넉넉한 갯벌까지 품었으니 당연한 것. 한반도에서 맛에 관해서라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 호남지방의 음식이고 남도의 맛이다. 얼른 가서 실컷 맛보자! 가장 본능적이며 직접적인 것이 세치 혀다. 한번 맛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맛, 찬바람 불어 올 즈음 제철을 맞는 벌교 꼬막을 찾아, 찬바람이 가실 즈음 길을 나섰다. 겨울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지났건만 아직 바람이 차다. 향긋한 꽃바람이 한반도를 채우기 전에, 겨울과 헤어지기 위해 떠난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모두가 봄맞이에 취해있을 때 한 계절을 묵묵히 지켜준 겨울을 보내러 남도로 향해보는 건 어떨까? 가장 먼저 봄이 도착하는 곳이니 생각해보면 겨울을 보내기에 이만한 장소도 없지 않은가? 복잡한 해안선이 만들어낸 풍경과 다양한 먹을거리를 품고 있는 남도의 겨울을 그리며, 꼬막을 찾아 나섰다. 조정래의 태백산맥 순천과 보성 사이, 여자만과 순천만, 이곳에 안긴 푸근하고 푸짐한 갯벌을 품은 벌교. 이 고장은 이념의 대립으로 빚어진 동족상잔의 비극을 다룬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무대로도 유명하다. 소설은 1948년, 여순사건이 일어나던 해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좌익이 장악했던 벌교가 다시 군경의 수중으로 들어간 뒤에, 좌익 비밀당원인 장하섭이 벌교로 잠입하였다. 정하섭을 숨겨주었던 소화의 초가집은 물론 가까이 자리한 현 부잣집도 보인다. 곳곳에는 아직도 일본풍이다. 소화다리, 부용교는 단순한 다리가 아니다. 여순사건 때 여기서 우익인사와 지주 등 10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반란군이 진압되었을 때는, 도처에서 좌익 인사들의 피가 흥건했다. 염상진이 지주들에게서 빼앗은 쌀을 소작인들에게 나눠주려고 쌓아 놓았던 홍교(보물 제304호)는 소화다리 상류에 있다. 원래 이 자리에는 뗏목으로 만든 다리가 있어. 벌교(筏橋)의 이름이 되었다. 이외에도 벌교에는 중도방죽, 야학교회를 비롯해 토벌대 숙소로 쓰이던 남도여관, 김범우의 기와집이 남아있다. 꼬막을 살펴보자. 정하섭을 위해 아침을 준비를 하는 소화가, 꼬막이 없어 어쩐다? 하는 장면부터, 염상구가 앙탈하는 외서댁을 완력으로 범하고 허리춤을 올리며 ‘쫄깃쫄깃한 것이 겨울 꼬막 맛이야!’하고 비유하는 모습도 떠오른다. 쫄깃한 꼬막은 벌교천의 민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갯강 주변 갯벌에서 잘 자라고 맛도 가장 좋다. 그래서일까. 여자만을 품은 갯벌을 두고 벌교 사람들은 ‘참뻘’이라고 부른다. 여기서 나는 꼬막이 ‘참꼬막’이다. 주름골이 깊고 껍질이 단단하다. 짭조름하고 쫄깃하면서 바다냄새까지 품고 있다. 그냥 먹어도 맛있고 반찬으로도 좋으니 별미 중 별미로다. 조정래는 태백산맥에서 꼬막은 ‘간간하고 쫄깃쫄깃하고 알큰하기도 하고 비릿하기도 쌉싸름한 맛’이라고 했다. 참꼬막만 있는 게 아니다. 거시기한 이름 ‘똥꼬막’이라고 부르는 새꼬막은 양식 꼬막을 말한다. 참고막에 비해 상대적으로 껍질에 주름이 얕다. 혹자들은 이를 두고 살짝 맛이 떨어진다고 평했다. 참꼬막과 새꼬막을 놓고 보면 겉모습만으로도 확연히 구분이 가능하다. 참꼬막은 추석부터 설날 무렵까지가 제일 맛있지만, 이른 봄 3월까지도 쫄깃하고 탱탱한 꼬막을 맛보기에는 무리가 없다. 또한 조개가 알을 낳으려면 새꼬막은 2년 참꼬막은 3년을 기다려야 한다. 여자만은 여자만이 다니는 만이 아니니. 누구나 타도된다는 안내문을 여객선에 붙여놓았다. 꼬막 중에서도 벌교산이 최고로 대접받는 것은 벌교 앞바다의 지리적 특성 때문이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가 감싸는 벌교 앞바다 여자만(汝自灣)의 갯벌은, 모래가 섞이지 않는데다 오염되지 않아 꼬막 서식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여자만 꼬막은 물을 붓지 않고 익힌다. 그리고 간을 하지 않아도 감칠맛이 난다 꼬막은 다른 조개와 달리, 익은 후에도 입을 꽉 다물고 있어. 성미가 급한 사람은, 틈 사이로 손톱을 비집어 넣어 젖히다가 손톱이 깨진다. 이때 위 뚜껑과 아래 뚜껑이 맞물린 이음 사이에, 숟가락을 들이밀어 지렛대처럼 젖히면 쉽게 열 수 있다. 꼬막 중에 최고급은 피조개다, 특이하게도 피조개는 양식한 것이 자연산보다 맛이 좋아 세 배 정도 비싸게 팔린다. 행님요.아니지 참. 아부지요 미움이 있는 곳에는, 그라고 거 머시냐 맴이 상해갖고 긴가 민가 하는 곳에는, 벼랑박에 부딧히면 이 모든 말씸을 검나게 조아허는 아멘 남도기행 벌교 가서 주먹자랑 하지마라. 벌교서 주먹자랑 말고 호남에는 ‘팔불여(八不如)’라는 말이 있다. 이는 흥선대원군이 팔도를 유람할 때 호남지방에 있던 고을의 두드러진 특색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오야붕 끼리 겨루는 큰 싸움은 주로 다리 밑에서 벌어졌다. 염상구가 벌교의 주먹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우두머리였던 쌍칼과 담력을 겨루던 다리가 철다리다. 도대체 벌교 주먹이 얼마나 세기에, 전국구로까지 대접받던 광주나 목포를 무색하게, 그런 말이 나왔을까? 시라소니, 김두한, 이화룡, 구마적, 신마적 등과 같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주먹들이 즐비한데. 벌교 가서 주먹 자랑 하지마라. 이 말의 상징적인 곳이 바로 소화다리다. 좌익과 우익의 피비린내 나는 충돌이 있었던 곳이다. 한 머슴이 소화다리로 나무를 팔러나갔는데 일본 순사가 마상에서 ‘조센진’하며 어린 처자에게 채찍질하는 것을 보고 분개한 나머지, 순사를 말에서 끌어내린 다음 소화다리 아래로 던져버렸다. 그일 외에도 머슴은 부녀자를 희롱하던 일본 순사를 주먹으로 때려죽인 적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그는 의병이 되고 나아가 의병장이 되었다. 본명은 안규홍, 몰락한 양반의 가문에서 태어나.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머슴살이를 하면서 편모를 모시고 살았다. 안규홍은 머슴들과 함께, 일본군의 탄압을 피해 전라도로 건너와 활동하던 함경도 출신 의병장 강성인의 휘하에 들어가 부장으로 활동했다. 대장이란 자가 부녀자를 겁탈하고 양민의 재물을 빼앗는 등 악행을 일삼자, 수하들이 그를 처단하고 안규홍을 의병장으로 추대를 하였다. 당시 의병들의 활약을 말해주듯 민간에서는 이런 노래가 유행했다. 이로써 벌교 주먹은 의로운 주먹이라는 것이 전설처럼 전해진다. 여기서 안담살이는 바로 그 머슴이다. 그는 일경에게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져, 32세 짧은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머슴 안담살이가 벌교 주먹의 원조라면 그 완성은 김항수다. 벌교 태생인 그는 한때 전라도 일대를 평정했던 주먹이었다. 집안도 좋아 아버지는 판사였다. 조선인은 아무리 재산이 많고, 머리가 좋아도 일본에 빌붙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김항수는 조선 사람을 괴롭히면 누구도 가만두지 않았다. 일단 싸움이 붙으면 손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고 한다. 더욱이 그에겐 든든한 뒷배가 있었다. 사고를 쳐서 잡혀 들어가도 판사인 아버지 힘으로 금방 풀려났다. 그러나 그의 말로는 비참했다. 술과 아편에 빠져서. 결국은 길거리에서 객사했다고 전해진다. 南道春風 전라도 생활사투리 1. 닌장, 이런 젠장 2. 걱서거그, 거기서 거기 3. 헉까막가, 할까나 말까나 5. 인나, 앙거, 둔너, 업져, 일어나, 앉아, 드러누워, 엎드려 6. 시방 각거여 막거여 어짝거여?, 지금 갈거냐 말 것이냐 어쩔 것이냐? 7. 어디 강가? 잉, 긍가? 개개. 어디 가십니까? 응. 그래요? 그럼 살펴가십시오. 8. 헉거여 막거여 헐라먼 언능 허고 아그먼 쪼리 가부러야., 할 것이여 말 것이여? 할려면 빨이 하고 그렇지않으면 저리 가거라. 9. 헝게 나스끄나 안헝게 나스끄나 기양 나 몰르요 해부끄나 막끄나, 하는 것이 나을까 하지않는 것이 나을까 차라리 나몰라라 해버릴까 말까 10. 빼뺏헌놈도 무겅것 뽈깡 들드만 등치는 남산만 해가꼬 그런 개분 것도 못들고 신찬허네., 빼빼 마른 놈도 무거운 것을 번쩍 들더니만 너는 등치만 커가지고 그런 가벼운 것도 못들고 시원찮네. 지리산의 산청 매화 134/19/03/10 명품 매화가 많이 피는 지역이 산청군이다. 토질과 기후가 맞아서인가. 매화는 한사(寒士·춥고 배고픈 선비)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자존심 강한 선비들이 숭상하던 나무요 꽃이다. 자존심은 빈한(貧寒)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남사 마을 탐매유람(探梅遊覽)에는 이 동네에 사는 어떤 화백이 안내를 해 주었다. 전국을 돌며 우리나라 산골 동네 산과 물의 정겨움을 그리는 '생활 산수' 화풍을 구축한 인물이다.
그가 나에게 보여준 매화는 하씨매(河氏梅), 이씨매(李氏梅), 박씨매(朴氏梅), 정씨매(鄭氏梅), 최씨매(崔氏梅)이다. 오성각발매(五姓各發梅)라고나 할까! 이 동네에는 유서 깊은 양반 집안의 고택마다 기품 있는 매화들이 피어 있었다. 하씨매는 '원정매'라고 하여 족보가 오래된 매화로. 고려말의 명사였던 원정공(元正公) 하즙(河楫·1303~1380)이 심은 매화 것이다. 이 동네는 쌍룡교구(雙龍交媾)의 명당이다. 두 마리 용이 서로 물고 물리면서 동네를 둥그렇게 감싸고 있는 형국이다. 암용의 머리에 해당하는 니구산(尼丘山)이 수용의 꼬리 부분인 당산(堂山)을 물고 있다. 석대산(石岱山)의 커다란 바위가 어머니 품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곽종석이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이 동네 후손들은 서울대에 유난히 많이 합격해 서울에 많이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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