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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그는 정말 ‘공산주의의 아버지’일까 /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김공회

雲山(뭉개구름을 머리에 이고있는 산) 2018. 5. 6. 13:48


마르크스, 그는 정말 ‘공산주의의 아버지’일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 김공회



카를 마르크스. <한겨레> 자료사진

카를 마르크스. <한겨레> 자료사진


▶ 2018년 5월5일은 카를 마르크스가 남독일의 소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난 지 200년 되는 날이다. 생전에 그는 해박한 사회

이론가이자 혁명적 노동운동가, 집요하리만치 사실에 천착하는 언론인이었고, 죽어서는 20세기 내내 지구의 절반을 

붉게 물들였던 공산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았다. 

그의 사상이 오늘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가 있는지 김공회 경상대 경제학과 교수가 묻는다.

독일 베를린의 훔볼트 대학교 본건물에 들어서면 다음 글귀가 방문자를 맞이한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 대리석 벽면에 커다란 금빛 글자로 박힌 이 문구는 이곳에서 공부했던 한 젊은이가 

1845년 무렵 노트에 휘갈겨 쓴 메모에서 따온 것이다.

 

기라성 같은 졸업생도 많은데 이 학교에서 5년을 보냈지만 정작 박사학위는 명성이 훨씬 떨어지는 다른 대학에서 받은 

사람의 출판되지도 않은 메모가 대학의 ‘얼굴’ 같은 곳에 어떻게 걸릴 수 있었을까?

그 젊은이의 이름은 카를 마르크스(1818~1883). 젊음의 치기마저 느껴지는 이 구절은 훗날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로 알려진 11개의 강령 중 가장 짧지만 후대에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단편이다. 

그것은 20대 중반의 마르크스가 대학을 떠나 본격적으로 사회활동에 뛰어들면서 내놓은 ‘출사표’와도 같았다. 

그는 비록 이를 세상에 공표하는 대신 자신의 비망록 안에 꽁꽁 숨겨두었지만, 이후 마르크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40여년의 시간을 세계 변혁을 위한 연구와 조직과 선동에 오롯이 바쳤다.


독일 훔볼트대 본건물 중앙계단에 적혀 있는 마르크스의 ‘테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구는 분단 뒤 동독 당국에 의해 1953년에 설치되었다.  김공회 제공
독일 훔볼트대 본건물 중앙계단에 적혀 있는 마르크스의 ‘테제’.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문구는 분단 뒤 동독 당국에 의해 1953년에 설치되었다. 김공회 제공


그러나 생전에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살았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타협을 모르는 논쟁가였던 그가 가는 곳엔 단결보다는 분쟁이 싹텄고, 해박한 지식과 빽빽한 논리로 꽉 찬 저작들은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자본론>이나 <공산당선언>마저도 그랬다. 

그는 늘 빚에 쫓기며 인생의 황금기를 영국 런던의 작은 독일인 망명자 커뮤니티에서 별 의미 없는 언쟁을 하는 데 허비했다.


마르크스, 공산주의의 아버지?

하지만 오늘날 그를 ‘실패자’로 기억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오늘의 세계가 형성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다. 그렇게 된 건 어느 정도는 그의 사후에 벌어진 일 때문이다. 바로 유럽에서 혁명적 노동운동의 확산,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1917년 러시아혁명이다. 


이를 통해 마르크스는 그 단짝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더불어 ‘공산주의의 아버지’로 추앙받기에 이른다. 

훔볼트대의 문구도 동독 시절(1953년)에 새겨진 것이다. 

하지만 덕분에 1990년을 전후로 공산주의가 사실상 몰락하자 동유럽 각지에 세워졌던 그의 동상도 끌어내려졌다. 

한때 그의 충실한 제자를 자임하던 학자들은 그의 사상의 유효기간 만료를 선언했다.


분명, 공산주의 체제의 이념적 기초를 제공한 (위대한) 이론가이자 혁명가라는 이미지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마르크스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기이한 일이다. 

실제로 그가 쓴 수많은 글 중에서 공산주의와 관련된 것은 지극히 소수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명실상부한 그의 대표작 <자본론>에서도 마르크스를 ‘공산주의의 아버지’라고 부를 만한 근거를 발견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의 태두로 꼽히는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난 곳이 러시아였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러시아는 마르크스가 살아 있던 때부터 그의 저작이 인기를 끈 유일한 나라다. 

<자본론>이 최초로 번역된 것도 러시아였다. 


그리하여 혁명의 영웅 레닌은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마르크스의 저작에 심취하였고, 본격적인 혁명가가 되기 전까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의 면모까지 보였다. 두 번째 이유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말년에 

독일의 사회주의 운동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점이다. 

<고타 강령 비판>(1875)이나 엥겔스가 쓴 <반뒤링론>(1878), <유토피아에서 과학으로의 사회주의의 발전>(1880) 같은, 공산주의의 아버지로서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핵심 저작이 생산된 것도 이 시기였다. 

그러나 이들을 마르크스의 대표작이라 하기는 어렵다.


그는 정말 ‘공산주의의 아버지’일까 마르크스 진면목 놓고 많은 논란
자본주의 ‘자동붕괴’ 가능성 아닌 노동자 투쟁 정당화하는 모순에 주목

20세기 지나며 복잡해진 자본주의 작동 구조 분석할 정교한 무기 필요
 피케티 등 대안 내놓는 사상 많아져 마르스크주의, ‘친구들’과 협력 필요 


‘진짜 마르크스’

그러니 공산주의의 몰락을 기화로 ‘마르크스주의는 끝났다’는 이들에 맞서, ‘여전히 우리는 진짜 마르크스를 모른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다. 

이들 중 일부는 마르크스의 저작집(영어판 전집이 50권으로 나와 있다)에 포함되지 않은 연구노트나 편지, 

독서 중에 책의 여백에 기록된 메모 등이 포함된 새로운 전집(여전히 출판중이다)을 섭렵하기 전까진 마르크스를 

안다고 할 수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정말 우리는 아직도 그를 모르고 있는가?


마르크스 사상의 진면목이 무엇인가를 두고 많은 논란이 있었다. 단적으로, 그는 철학자인가 경제학자인가? 

그의 저작을 전체적으로 읽어보면, 그가 20대 후반 무렵에 철학에서 경제학으로 옮겨갔다는 게 꽤 명확히 드러난다. 

여기서 철학을 ‘세상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경제학을 ‘세상이 어떠한가’를 다루는 학문으로 단순히 정의해보자. 


20대의 마르크스가 일련의 철학적 사유를 거쳐 현실의 부조리를 파악하고 이를 근거로 노동자와 하층민들을 

조직해 실제로 세상을 변혁하는 데 주력했다면, 30대 이후가 되어서는 변혁운동에 탄탄한 과학적 기초를 놓기 위해 

현실의 물질적 구조 연구에 매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그가 <공산당선언>을 내면서 열정적으로 매달렸던 1848년 프랑스 2월혁명의 실패로 인해 강요된 측면도 있지만, 현실 변혁의 과학적 근거를 현실 그 자체에서 찾는다는 태도는 마르크스가 당대의 다른 혁명가들로부터 자신을 

차별화하는 특징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적극적인 것이다. 


앞서 인용한 ‘테제’가 철학의 무기력함에 대한 당시 마르크스의 환멸을 담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출사표’와도 같았을 이 ‘테제’를 그가 끝내 생전에 공개하지 않은 것은 과학적 기반 없는 실천의 무모함에 대한 각성 때문이리라.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러한 이행을 ‘인식론적 단절’이라고 불렀다.


그런데도 마르크스가 여전히 철학자였던 20대에 쓴 저작들이 꾸준히 읽히고, 나아가 어떤 이는 거기 담긴 생각들

-대표적으로는 ‘소외’에 관한-이 마르크스 사상의 정수라고까지 여기는 까닭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여하튼 철학의 영역 안에서 이룬 이론적 진전이 고유하고 탁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이유, 즉 저작들의 출간 시기 문제도 있다. 핵심적인 초기 저작들로 꼽히는 <경제학 철학 수고>(1844, 이하 <수고>)나 <독일 이데올로기>(1846)는 애초 마르크스가 출간용으로 쓰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의 유고를 관리하는 이들도 

그 존재를 모를 정도로 잊혀 있었다. 

이들은 1915년에 레닌이 쓴 마르크스의 전기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1930년대 들어서야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독일 베를린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에 서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1986년에 설치된 이 동상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존폐 논란이 있었으나 다행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광장 중앙에 위치했던 동상은 2010년 끝내 광장 구석으로 밀려나야 했는데, 그 이유는 이데올로기적인 게 아니라 도시개발이었다. 김공회 제공
독일 베를린 ‘마르크스-엥겔스 광장’에 서 있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동상. 


1986년에 설치된 이 동상은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뒤 존폐 논란이 있었으나 다행히(?) 살아남았다. 그러나 광장 중앙에 위치했던 동상은 2010년 끝내 광장 구석으로 밀려나야 했는데, 그 이유는 이데올로기적인 게 아니라 도시개발이었다. 김공회 제공당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미공개 원고의 출간은 흔한 일이었다. 

그러나 철학적 성격의 위 저작들, 특히 <수고>가 특별했던 것은, 그것이 한편으론 비인간적 면모를 노골화하는 

당시 대량생산 독점자본주의에 대하여,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점차 생산력주의에 매몰되면서 인간의 주체성을 

무시하는 소비에트 체제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의 무기’를 제공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마르크스는 이미 이론적으로 청산해서 출간의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던 <수고>가 <자본론>과 

동급의 저작으로까지 격상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르크스가 본 자본주의

한동안 <수고>와 같은 마르크스 생전에 출간되지 않은 초기 저작들이 다소 과한 대접을 받은 데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는 물론 공산주의 자체가 거의 몰락한 지금, 그리고 자본주의도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 

신자유주의, 글로벌 금융위기 등을 거치며 한층 복잡해지고 강력해진 지금, 직설적인 인간주의적 비판보다는 

정교한 무기가 자본주의의 극복을 원하는 이들에겐 필요하다.


앞에서 시사했듯 바로 그러한 필요성이 철학에서 경제학으로 마르크스의 지적 발달을 이끌었고, 그 결과가 <자본론>이다. 

<자본론>은 마르크스가 49살이던 1867년에 출간되었지만, 이를 위한 연구는 1840년대에 시작되었고, 

런던으로 망명한 뒤인 1850년께부터 본격화되었다. 


<자본론>의 핵심 내용을 몇 줄로 요약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분명한 것은 마르크스가 이 저작에서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작동 메커니즘에 대한 하나의 설명을 

내놓으려 했다는 사실이다.


마르크스의 설명은 독특하다. 

보통의 경제이론이 자본주의 경제를 마치 하나의 기계장치처럼 각 부분이 맞물려 순조롭게 돌아가는 시스템으로 

묘사하는 반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경제에 자멸적인 성격이 내재해 있다고 주장했다. 

이 체제가 자본가와 노동자라는 서로 적대하는 두 계급 간의 관계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에 따르면, 이윤동기에 의해 추동되는 자본주의에서 자본가는 이윤을 오직 노동자를 착취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지만, 

동시에 서로간의 경쟁 때문에 노동을 줄이고 기계화에 매진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성공적인 몇몇 개별 자본에는 당분간 높은 이윤을 보장해줄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본 전체에 대해 착취의 재료 곧 노동을 줄임으로써 평균이윤율을 떨어뜨리고 

경제를 파국으로 몰고 갈 것이다.

마르크스가 태어난 독일의 소도시인 트리어의 관광청에서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기념지폐.
마르크스가 태어난 독일의 소도시인 트리어의 관광청에서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해 발행한 기념지폐.

물론 이것은 ‘가능성’일 뿐이다. 경제의 위기는 해외의 값싼 원료와 노동력을 사용함으로써, 

주식회사 제도를 통해 이윤율 저하의 부담을 전 국민에게 분산시킴으로써, 새로운 산업분야를 개척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여러 방식으로 극복될 수 있음을 마르크스는 잘 알았다. 


그가 주목한 것은 자본주의의 ‘자동붕괴’ 가능성이 아니라, 모순을 누적시키는 자본주의의 작동방식 그 자체가 

체제 변혁을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을 역사적으로 정당한 것으로 만들고 또 거기에 힘을 실어주기도 하리라는 점이다. 

<자본론>을 위한 연구와 집필에 매진하면서도 동시에 국제적인 노동자 운동을 조직하는 데 

마르크스가 진력했던 것은 바로 그래서다.


오늘 마르크스의 의의

자본주의의 그러한 모순은 현재진행형일 뿐 아니라 지금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첨예하게 발달하고 있다. 

특히 ‘신자유주의’ 하에서 복지를 후퇴시키고 임금을 떨어뜨리면서까지 자본의 축적조건을 좋게 만들어 주었는데도 

경제의 성장이 둔화되어온 까닭은 무엇인가? 경제의 성장률은 그렇게 떨어지는데, 왜 불평등은 오히려 증가하는가? 


생산의 전자동화와 그에 따른 생산영역에서 노동의 영구적 추방까지 거론되는 오늘날, 왜 세계경제는 

더 풍요로워지는 게 아니라 역설적으로 장기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는가? 혹시 세계경제는 새로운 틀을 필요로 하는 것 아닌가?

돌이켜보면 오직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들만이 불충분하게나마 지난 30년간 위와 같은 질문을 꾸준히 제기해 왔다. 


다만 정치사회적 환경의 악화(노동자 계급 분열, 노조 와해 등)로 위기의 진단이 체제의 위기로, 

그리고 체제의 변혁 움직임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피케티의 불평등론같이 2008년 위기 이후 

자본주의의 모순에 주목하는 논의들이 많아졌다는 점이다. 


그뿐만 아니라 꼭 마르크스주의에 입각하지는 않더라도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내놓는 여러 사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그간 ‘이론적 투쟁’에만 익숙했던 마르크스주의는 ‘친구들’과 비판적 협력을 하는 법을 익혀 나가야 할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특장점이 발휘될 수 있는 기반, 곧 노동자 계급의 단결과 역량 강화를 달성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마르크스가 의의가 있다면, 바로 이런 의미에서일 것이다.


= 한겨레 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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