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는 ? 국내 에서는 6.25사변 이라고 호칭하고, 국제적으로는 한국 전쟁이라고 불린다. 소련의 탱크, 따발총 등의 무기와 전쟁 물자의 지원으로 군사력을 키운 김일성 군대가 중국 국민당의 장계석군대와 공산당의 모택동 군대간 중국 내전에 중공군의 지원 요청으로 인민군 2개사단 이상의 병력이 전쟁 종료시 까지 참전 하였다. 이로 인해 북한군은 전투력을 숙달 하여 막강해진 상태였으며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에치슨 라인 선포로 미군이 한국에서 철수한 시기를 기회라 여기고 38도선 전역에서 1950년 6월25일 새벽에 기습 남침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였다. 국군은 탱크와 야포로 무장되고 전투경험을 갖춘 19만여명의 인민군 병력에 밀려 탱크1대와 야포 1문도 없는 9만여명에 불과한 준비안된 열세한 병력으로 방어 하다가 한달만에 낙동강 방어선까지후퇴 할수 밖에 없었다. 유엔은 하다 못해 미국의 주도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16개국의 유엔군이 파병되어 참전하게 되었다. 유엔군이 9월15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서울을 되찾았고 압록강 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요청으로 중국이 개입하여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다시 서울을 빼앗겼다가 그후 탈환하였다. 그후 1953년 7월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될때 까지 전쟁이 계속 되었으며 3년동안의 전쟁으로 인명피해가 약 4백5십만명에 달하고 남한의 43%산업시설과 33%의 주택이 파괴되었다 그후 남북한은 휴전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옮겨 온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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