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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400週忌, 허균은 “할 말이 있다”

雲山(뭉개구름을 머리에 이고있는 산) 2018. 7. 20. 12:20



올해 400週忌, 허균은 “할 말이 있다”



2018년은 다산 정약용의 해배(解配) 200주년, ‘목민심서’ 저술 200주년인 ‘정약용의 해’(남양주시 선포)입니다. 연초부터 학술강좌와 도서 출판, 창작 판소리 공연, 과거(科擧) 재현 등 각종 기념행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2018년은 또 세종대왕 즉위 6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대왕을 기리는  문화제, 패션쇼, 종묘제례악 등의 행사도 연중 계속 펼쳐지고 있습니다.

외국인의 경우엔 탄생 200주년을 맞은 칼 마르크스와, 역시 탄생 200주년을 맞은 프랑스 작곡가 샤를 구노를 재조명하는 학술행사와 공연이 세계 각지에서 열리고 있습니다. 

올해는 ‘홍길동전’으로 유명한 허균(1569~1618)의 사망 40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조용합니다. 탄생이나 즉위와 같은 경사가 아니라 사망을 기념하는 게 어색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허균이 역모를 꾀하다 발각돼 처형된 역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허균의 역모와 처형에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습니다. 사건의 본질이 무엇인지, 허균이 진정으로 지향한 게 무엇인지 완전하게 알지 못한 채 400년이 흘렀습니다. 1618년 광해군 10년 당시 허균의 심문과 처형의 경위는 광해군일기 외에 참고할 만한 기록이 거의 전무합니다. 진상 규명에 결정적인 사료도 발굴된 바 없습니다.

당시 허균은 대북(大北)의 영수 이이첨(1560~1623)에게 속아 자신이 풀려날 줄 알고 있다가 형장으로 끌려 나갔습니다.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뒤늦게 상황을 인식한 허균은 그때 “하고 싶은 말이 있다”[欲有所言]고 크게 소리쳤지만, 국청(鞫廳)의 상하가 못 들은 척했고, 왕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들이 하는 대로 맡겨두었다고 합니다.

허균은 이내 능지처참을 당했습니다. 당시 허균과 달리 인목왕후 폐모론에 반대했던 기자헌(1567~1624) 전 영의정조차 “예로부터 형신(刑訊, 고문과 신문)도 하지 않고 결안(結案, 사형 판결문)도 받지 않은 채 공초(供招)만 받고 사형으로 나간 죄인은 없었으니 훗날 반드시 이론이 있을 것이다.”라고 했답니다. 허균은 죽을 줄도 모르고 있다가 죽었습니다. 그가 하려 했던 말은 400년이 되도록 여전히 들리지 않고 있으며 ‘훗날 이론’도 별로 제기되지 않았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문가에서 태어난 허균은 서자(庶子, 첩이 낳은 아들)나 얼자(孽子, 천민이 낳은 아들)가 아닌데도 스스로 서자인 것처럼 사회에서 소외된 서얼들과 잘 어울리고, 차별이 없는 세상을 이루려 했습니다. 41세 때인 1610년쯤 쓴 것으로 추정되는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그의 정신적 지향과 이념을 잘 보여줍니다.  

허균은 조선 최고의 문장가요 과격한 인문주의자라는 평을 받아왔습니다. 그에 대한 평가에 빠지지 않는 게 재주를 겨룰 만한 짝이 없을 만큼 글을 잘 쓰지만 요괴라고 할 만큼 망령되고 경망스럽고 괴이하고 몸가짐을 삼가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친상(親喪) 기간에 기생을 끼고 놀고 지방관을 맡아서는 공무는 뒷전인 채 음풍농월로 풍류를 즐기는 사람을 그 시대의 사대부들이 좋아할 리 없지요. 

게다가 허균은 “천하에 두려워할 만한 자는 오직 백성뿐이다”라는 말로 시작해 윗사람들과 왕의 잘못을 채우친 ‘호민론(豪民論)’이나 가문과 과거로 한정해 사람을 뽑지 말고 널리 인재를 구하라는 ‘유재론(遺才論) 같은 글을 썼으니 용납될 리가 없었습니다. 시대를 앞선 개혁사상을 품고 예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지향하는 인물은 서둘러 제거해야 할 위험인자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허균은 벼슬을 받고도 파직(罷職)과 강등을 되풀이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됐습니다.

허균은 그러나 “내가 옛사람을 보지 못해 한스러운 게 아니라 옛사람이 이렇게 노는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고 말하거나 “사람들이 내 시를 보고 당에 가깝다, 송에 가깝다 하지 않고 ‘이건 허균의 시이다’라고 말했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자아와 개성에 충실했던 그는 파직당한 뒤 쓴 시에서 “그대들은 모름지기 그대들의 법을 지키게/나는 나름대로 내 삶을 이룰 테니”[君須用君法 吾自達吾生]라는 유명한 말을 합니다.

허균의 업적 중 문학적으로 중요한 것은 ‘홍길동전’ 창작 외에도 우리나라의 시를 종합한 방대한 분량의 ‘국조시산(國朝詩刪)’과 같은 시집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엮은 것입니다. 유배기간에, 그동안 잘 먹었던 음식을 그리워하며 팔도의 먹거리를 두루 망라한 ‘도문대작(屠門大嚼)’도 독특하고 의미 있는 저작입니다.

그를 비롯한 허씨 문중의 산소는 당초 지금의 서울 서초동에 있었으나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따라 1968년 경기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으로 옮겨졌습니다. 강릉시 초당동에는 허균 4부자와 누나 난설헌 등 허씨 5문장의 시비가 있습니다. 허균의 외가가 있던 강릉시 사천면 사천진리 교산(蛟山) 아래의 애일당(愛日堂) 터에는 허균의 시비가 쓸쓸하게 서 있습니다. 

허균이 철폐를 요구했던 서얼금고(庶孼禁錮)는 태종 때 시작돼 고종 때 갑오경장을 계기로 겨우 철폐됐으니 480년간 조선 사회를 얽어매고 숨통을 조였던 셈입니다. 

그동안엔 ‘역적’을 기리거나 기념하는 사업을 할 수 없었겠지만, 이제 시대의 선각자라는 점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으니 허균의 사상과 삶을 더 분명하고 정확하게 파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자체를 중심으로 관련된 문화유산을 가꾸고 의미를 새로 매기는 작업도 전개되면 좋겠습니다. 그의 기일은 음력 8월 24일, 양력으로는 10월 12일입니다. 허균은 지금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외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옮겨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