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주의 거장 들라크루와 ..드라크르와(Eugene Delacroix)
■낭만주의의 거장이자 색채의 해방가라고 일컬어지는 들라크르와 만큼 서양미술사에서
커다란 위치를 차지하는 화가도 드물 것이다.
그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주제면과 양식적인 면에서 본다면 주제면에서는,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가 1822년 살롱전에서 성공을 거두고,
1823년 제리코가 사망하면서부터 프랑스 낭만주의의 새로운 거장이 되는 들라크르와는
문학·음악·종교 등에서 주제를 취하면서 이후 10년 동안〈키오스 대학살〉(1824),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등 격렬한 성격의 작품들을 주로 제작했다.
이러한 그의 낭만주의적 주제는 모로·퓌비 드 샤반느에 이어 르동의 상징주의로 이어져
근대미술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파이톤을 물리치는 아폴로
신고전주의는 다비드가 나폴레옹 황제의 퇴각과 아울러 국외로 추방되면서 행보가 다소 주춤거려졌다. 전통적인 낡은 틀을 거부하고 풍부한 인간의 감정을 열자는 움직임은 이미 화가들 사이에서 동요를 일으키고 있었고, 이 같은 기회는 낭만주의가 일어설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
19세기의 회화 사조는 고전주의의 반발과 대립을 들고 일어섰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규범과 전통은 더 이상 그들에게 회화가 갖는 재미와 신선한 감동을 주지 못했다. 그 뒤를 잇는 다음 세대들의 의욕은 실재감을 충만하게 만들어 힘차게 표현하고, 미묘한 인간적 감정의 아름다움까지 배려하는 섬세함을 무기로 했다. 물론 이 같은 반향은 미술계에 큰 거부감을 초래했다. 하지만 이는 개혁과 변화에 따른 필수 불가결한 요소 중 하나였다. 고전주의에 대한 이들의 압력은 날로 거세졌고, 들라크르와는 이 운동에 나름대로 신념을 갖고 몸을 던진다. 들라크르와라는 한 화가의 개성 있는 투쟁은 이 때부터 시작된다.
사르다나팔르의 죽음
감성과 개성, 상상력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새롭게 승화시킨 들라크르와는 강렬한 색채와 명암의 대비를 표현하면서 신고전주의 회화에 정면으로 도전한 화가이다. 하지만 신고전주의가 성행했던 시대에 들라크르와의 이 같은 도전은 ‘회화에 대한 모독'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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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이 같은 들라크르와의 작품 세계는 과연 어떻게 형성되어 온 것일까. 1798년 파리의 근교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비교적 유복했다. 들라크르와는 8살 때부터 고전에 심취하며 모범적인 학생으로 성장해 나갔다. 이는 후에 화가가 된 그에게 격조 높은 지성과 인격 형성, 심지어는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해 주었던 경험의 원천이었다.
The Barque of Dante 1822
이 무렵 그는 문학 뿐만 아니라 음악에도 대단한 열의를 품고 있었는데, 뛰어난 음악적 재능은 주위의 부러움을 한 몸에 샀다. 실제로 그의 누나를 개인 레슨하러 왔던 당시 유명했던 오르간의 명수는 들라크르와의 어머니에게 음악가로 키울 것을 제안할 정도였다. 하지만 결국 그는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당대의 거장 제리코로부터 그림을 배웠던 들라크르와는 단순한 자연의 모방을 넘어서, 그림은 영혼을 울릴 수 있는 힘을 갖고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장 절실했던 것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감동적으로 표현해 내기 위한 풍부한 상상력이었다.
들라크르와의 재능은 1822년 <지옥의 탄테와 베르길리우스>가 살롱에 입선하면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듬해 그는 영국의 수채화가 테리드필딩과 한동안 동거를 하면서 영국적인 취향에 심취하게 된다. 18세기풍의 예절을 엄격히 지켜왔던 들라크르와의 집안 분위기는 그를 어린 시절부터 고지식하고, 때로는 영리하며, 중후한 멋을 지닌 화가로 만들어 놓았다. 이 같은 그의 취향은 당연히 영국에 대한 관심으로 자연스럽게 유도되었다. 그리고 1825년에는 급기야 영국으로 건너가 세익스피어의 연극에 깊이 감동하게 된다.
Pieta 1850
Andromeda 1852
그는 문학적 작품에 나타나는 추상성을 자신의 작품 속에 끌어들이고, 극적이면서도 시적인 운율 또한 차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들라크르와의 작품에는 단테를 비롯한 세익스피어, 괴테 같은 작가들의 문학과 연결되는 내용이 도처에 등장하는 것이다.
들라크르와는 풍경화와 인물화, 정물화 등을 비롯해 무려 1만여 점의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에는 떨림이 살아 숨쉬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깊은 내면에서 솟구치는 강렬한 영혼의 울림이다. 끊임없는 습작을 통해 사물과 인간의 움직임을 표현했고 이를 통해 감정의 몰입을 추구하고자 노력했다. 적어도 그에게 그림은 눈으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문학성을 충만하게 내포하고 있는 들라크르와의 낭만주의적 성향은 신고전주의의 이성적인 미와 뚜렷하게 대비되었다. 그에게는 인간 하나 하나의 모든 감수성이 작품에서 중요한 개성미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The Entry of the Crusaders into Constantinople 1840
들라크르와는 아름다움이 모든 이들에게 똑 같이 반응되는 유일한 그 무엇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는 이들의 개성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의 예술적 창조 작업은 이 같은 목적에 부합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어쩌면 그는 시대를 잘 못 만난 영웅이었을지 모른다. 뛰어난 상상력, 날카로운 지성, 예민한 감수성은 오히려 19세기에 가장 이해받지 못해 오해의 소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들라크르와는 회화 기법에 대담한 혁신을 가져온 인상파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이후 현대 표현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는 작품을 통해 자신의 시적 감흥을 전달하고 싶어했다. 이를 위해 형태와 빛, 마치 교향곡과도 같은 채색이 창조되었고, 이를 조화로운 통일체로 완성시켰다.
알제리 여인 1834
Fanatics of Tangier 1837-38
낭만주의와 그들의 표현기법
낭만주의는 18세기 말에서 19세기에 걸쳐 전유럽에 탄생한 예술적 경향이다. 개성과 자아 해방을 주장했던 이들은 상상과 무한을 향한 동경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낭만주의의 주요 특징은 형식보다 자유로운 내면 세계의 표출이었다는 점, 현실을 초월한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창조했다는 점, 그리고 이성이 지배하는 공간을 부정하고 공상과 상상력에 의해 창조되는 세계를 존중했다는 점이다. 고전주의의 차가운 형식 존중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프랑스 낭만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들라크르와의 경쟁자이자 다비드의 뒤를 이은 고전주의자 앵그로에게서 일찌감치 그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어 제리코를 거쳐 들라크로와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자유분방한 색채, 유동적인 필치, 힘 있는 동세에 찬 구성 등 기법 면에서도 주목을 끌었다. 특히 들라크르와의 이국적 취향이 만들어 낸 작품들은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특성을 여실히 드러낸다. 낭만주의의 표현기법은 선명한 색채와 강한 움직임, 그리고 이성보다는 인간의 감성적인 측면에 호소한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낭만주의 회화의 감상법은 눈으로 보고 이해하는 그림이 아니라, 작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의 호소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태도가 필요하다.
The Abduction of Rebecca 1858
Arab Horses Fighting in a Stable 1860
드라크르와(Eugene Delacroix)
자화상 1837
Still Life with Labsters 1826-1827
Cleopatra and the Peasant
Orphan Girl at the Cemetery 1824
Lion Hunt 1854
Arab Saddling His Horse 1855
Apasia 1824
앵무새와 여인
Greece on the Ruins of Missolonghi 1826
Louis d`Orleans Showing his Mistress 1825-1826
The Sultan of Morocco and his Entourage 1854
Lion with a Rabbit
■양식적인 면을 살펴보면 1832년 모로코 여행 이후 그는 이전의 작품들에 보이는 전통적인 기법,즉 명암의 대비와 화면을 매끄럽게 하기 위한 유약의 덧칠 등에서 완전히 벗어나 독창적 기법을 선보인다. 색채를 분할하고 붓질을 거침없이 함으로써 화면에 거칠고 표현적인 특성을 남기는데, 이로 인해 색채가 회화의 구조 속에 들어가게 되고 붓 터치가 하나의 독립적 모티프가 되는 것이다.〈알제리의 여인들〉,〈유대인 결혼식〉,〈탕헤르의 광신도들〉등의 작품에서 이러한 특징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양식적 특징은 선이 아닌 색채에 기초를 두는 쿠르베나 바르비종파,그리고 인상주의라는 19세기 미술사의 또 다른 중대한 흐름으로 이어진다.
■들라크르와는 하나의 고정된 화파 안에 집어 넣기에는 너무 포괄적인 작가다. 그의 회화적 특질은 단순한 낭만주의를 넘어선다. 작품 세계가 장식적이며 바로크적인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고전주의의 단순성과 웅대함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고대 미술의 규범과 그것이 르네상스를 거치면서 변화된 모습을 완벽하게 소화하고 있는데, 그런 연유로 다비드의 신고전주의를 맹렬히 비난하기도 했다.
■생 술피스 성당의 작품〈야곱과 천사의 싸움〉(1849~64)을 제외하고 들라크르와의 종교화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편이다. 사실 그의 초기 종교화 작품들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디드로의 무신론·볼테르의 반교권주의·루소의 검신론에 빠져있던 들라크르와는 오랫동안 불가지론을 주장했다. 1850년 이후 나이가 들면서 그의 이러한 불가지론은 형이상학적 고뇌로 대치되고 있다. 이 정신적 추구는 신약성서의 유명한 장면들을 휴머니스트 합리주의자의 시각으로 끊임없이 다루기 시작한 계기가 된다. 우선 그리스도의 육체적 고통·고뇌에 밀착,그리스도의 육체 위에 쏟아지는 수많은 비탄의 장면을 고뇌·슬픔·혼란으로 표현하고 있다.〈갈릴리 호수 위의 그리스도〉는 광포한 자연 앞의 인간에 관한 극적 주제를 바다의 정경과 연결시키고자 했는데, 이 종교화의 풍경 장면은 성서 개념에 충실한 완벽한 상상화인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 상상력을 만들어 낸다고 할 수 있다.
■들라크르와는 단 한번도 살롱전에 순수한 풍경화를 출품한 적은 없다. 그렇지만 후기에 자연을 소재로 그린 작품들은 역사화 작품들보다 훨씬 더 미학적 감수성을 보여준다.1840년부터 그는 자연현상에 관해 과학적이며 체계적인 실험에 몰두했다.이러한 연구의 기본적 동기는 모든 종류의 그림을 그리고자 했던 들라크르와의 열망이라고 하겠다. 그의 계속된 색채 분할은 그의 자연과의 교감을 잘 나타내 주며 풍경화가로서의 재능을 부각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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