繪畵 彫刻 等

밀레의 "만종"에 얽힌 슬픈 이야기

雲山(뭉개구름을 머리에 이고있는 산) 2012. 10. 28. 21:17

 

 

 

 밀레의 "만종"에 얽힌 슬픈 이야기

 

1857년 저녁노을이 지는 들녘에서
가난한 농부 부부가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캐다가 만 감자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멀리 보이는 교회당이 정지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백화점 소유주였던 알프레드 쇼사르가
80만 프랑에 이 작품을 구입 해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한 후
한 번도 거래된 적이 없었던
'만종'은 값을 매긴다는 게 불가능한 보물입니다.

 

그러나 작품이 처음 만들어진 1860년 당시
밀레는 물감을 살 돈조차 없는 가난 한 화가에 불과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상 아르투르 스테반스가
그림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1,000프랑을 지원하게 됩니다.

이 1,000프랑으로 탄생한 그림이 바로 ' 만종'입니다.

 
이렇게 탄생한 만종은
100년 만에 80만 프랑 값어치를 얻었고
그로부터 또 10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보물이 되었습니다.

1,000프랑을 지원한 것이 국부(國富)를 일구어낸 것입니다.

 
루브르에 돌아오기 전 '만종'은 미국 아메리카 미술협회에 팔렸습니다.

프랑스 측은 국회와 행정부는 물론 모금활동까지 벌여가며
'만종'이 미국에 팔리는 것을 막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부자나라 미국을 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프랑스가 자존심이 상한 채 주저앉아 있을 무렵
백화점 재벌 알프레드 쇼사르가 미국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만종' 을 다시 사들인 것입니다.
쇼사르는 이 그림을 개인 자격으로 소유하지 않고 루브르에 기증했습니다.

 

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쇼사르가 없었다면
'만종'은 지금쯤 미국의 어느 박물관에 있을 것입니다.
이 그림은 '이삭줍기'와 더불어 많이 알려진 그림 중 하나입니다.

 

그림을 보면 하루 일을 마치고
농부 부부가 교회 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그림으로 보입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있습니다.

 

농부 부부가 바구니를 발밑에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바구니가 감자씨와 밭일도구를 담은 바구니로 알고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바구니에는 씨감자가 들어있던 게 아니라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가 들어있었습니다.

 

그 시대 배고픔을 참고
씨감자를 심으며 겨울을 지내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아기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 죽은 것입니다.


죽은 아기의 시체를 보며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만종'입니다.

그런데 왜 그림 속의 아기가 사라졌을까?

이 그림을 보게된 밀레의 친구가
큰 충격과 우려를 보이며 아기를 넣지말자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대신 감자를 채운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그저 농촌의 평화로움을 담고 있는 그림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이렇게 목적변경이 된 그림의 소재에 대하여
헤겔은 감각적 환원이라고 말합니다.

 

모든 학문을 무전제적(無前提的)인 기초 위에 확립하려는 의도에서
모든 선입견을 배제하고 현실 그 자체로 환원해 나가기 때문입니다

(Zu den Sachen selbst).
이러한 학문은 실증주의와 달리
사실이 아닌 사실의 본질을 직관에 의해 파악하려 학문을 말 합니다.

 

이같이 사실로부터 본질의 인식에로 나아가는 과정이 형상적 환원이며
실재성·초월성에 관해 판단을 중지하고(에포케)
그러한 사항들을 괄호 속에 넣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절차를 ‘선험적환원’이라고 합니다만,

이 두 가지 환원을 한데 묶어 ‘현상학적환원’이라고 합니다.
후설의 현상학은 막스 셸러,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 퐁티,
베트남의 트란 듀크 타오 등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밀러의 경우 밭을 갈다가
배고파 죽은 아이를 확인하고 시체가 담긴 바구니 앞에서 기도하기에 이릅니다.

그들 자신이 현재 억제치 못하는 배 고품과
배고파 죽은 아이의 죽음의 명증한 현상을 통해서
배부른 미래를 꿈꾸었는지도 모릅니다.